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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 소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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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가 소코는 1622년 일본 아이즈에서 태어난 유학자이자 군사가이다. 주자학을 비판하고 고학(古學)을 주창했으며, 《중조사실》을 저술하여 일본의 독자성을 강조했다. 40세에 주자학을 거부하고 에도에서 추방당한 후 하리마 아코 번에서 유교와 군사학을 가르쳤으며, 47인의 로닌의 지도자인 오이시 요시오에게 영향을 주었다. 1675년 사면 후 에도로 돌아와 군사학을 가르치다 1685년 사망했으며, 그의 묘는 도쿄 신주쿠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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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 소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미즈노 마사모리가 쓴 야마가 소코의 초상화
미즈노 마사모리가 쓴 야마가 소코의 초상화
본명야마가 다카사다 (山鹿 高貞)
다른 이름야마가 소코 (山鹿 素行)
야마가 효부 (山鹿 兵部)
생애
출생1622년 9월 21일
출생지아이즈와카마쓰
사망1685년 10월 23일
사망지에도
국적일본
직업
직업철학자
작가
업적
주요 저서

2. 생애

1622년 무쓰국 아이즈 (지금의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쓰시)에서 낭인의 아들로 태어난 야마가 소코는, 어린 시절 에도로 이주하여 하야시 라잔에게서 주자학을 배우는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주자학에 의문을 품고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40세가 되던 해, 야마가 소코는 하야시 가문이 옹호하는 주자학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그 영향 아래서 쓴 모든 책을 불태우는 과감한 행동을 보였다. 그는 오염되지 않은 진리는 오직 공자의 윤리적 가르침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 유교 전통 내에서의 후속 발전은 원래의 교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지배 이념이었던 주자학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으며, 호시나 마사유키는 이를 도쿠가와 막부의 권위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여 야마가 소코를 에도에서 추방했다.[2]

에도에서 추방된 야마가 소코는 하리마국 아코번으로 이주하여 아사노 나가토모와 교류하며 유학과 군사학을 가르쳤다. 그의 영향력은 훗날 겐로쿠 아코 사건에서 오이시 요시오를 통해 나타나기도 했다.[2]

1675년, 야마가 소코는 사면을 받아 에도로 돌아와 10년간 군사학을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1685년 사망 후, 그의 묘는 도쿄 신주쿠소토 선종 사찰인 소산사에 안장되었으며, 1943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5]

2. 1. 초기 생애

1622년 무쓰국 아이즈 (지금의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쓰시)에서 낭인의 아들로 태어났다.[10][11] 1628년 에도로 이사와,[1] 1630년 하야시 라잔 아래서 주자학을 배웠다.[12] 1637년에는 오바타 가케노리, 호조 우지나가에게서 병법을, 히로타 단사이에게서는 신토를 배웠다.[12] 15세에 가이국으로 가서 오바타 가게노리에게 병학을 배우기도 했다.[1]

이후 주자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에도에서 쫓겨났다. 그 후 하리마 아코번에서 번사(藩士) 교육을 맡았다.[2] 1652년 아코번 아사노 가문에 군신의 예를 갖추었으나,[13] 1653년 아코성 축성에 관해 조언했다는 설이 있지만, 일기에는 축성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적혀 있다.[14][15] 1660년 아사노 가문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물러났다.[17]

1662년 무렵부터 주자학에 의문을 품고 새로운 학문 체계를 연구해, 1665년에는 관념적인 주자학을 비판하고 '일상'의 학문을 주장했다.[12] 같은 해 아버지 다카미치가 사망했다. 1666년 호조 우지나가에게 호출받았으나, 저서 『성교요록』이 주자학 비판이라는 이유로 하리마국 아코번에 유배되었다.[2] 유배지에서는 술과 고기를 먹을 수 없었고, 존경하는 아버지의 묘에 참배할 수도 없어 괴로워했다고 회상했다.[12] 이 시기에 『무가사기』를 집필했다.

2. 2. 주자학 비판과 유배

1622년 야마가 소코는 주자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에도에서 쫓겨나 하리마 아코번에서 번사(藩士)의 교육을 맡았다.[1] 그는 40세에 하야시 가문이 옹호하는 주자학을 거부하고 그 영향 아래서 쓴 모든 책을 불태웠다. 호시나 마사유키는 지배적인 정통성에 대한 이러한 공격을 도쿠가와 권위에 대한 잠재적인 도전으로 보고 에도에서 그를 추방하라고 명령했다.[2]

2. 3. 에도 귀환과 사망

1675년 야마가 소코는 사면을 받고 에도로 돌아가 10년 동안 군사학을 가르쳤다. 1685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묘는 도쿄 신주쿠에 있는 선종 소토 사찰인 소산지에 있다. 그의 묘는 1943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5]

야마가 소코의 묘

3. 사상

야마가 소코는 유교의 우주관인 천원지방을 부정하고 지구구체설을 지지했다.[30] 간에이 21년(1641년), 19세 때 이미 "소행헌"이라고 칭했다. 이는 "군자는 그 자리에 처하여 행하고, 그 밖을 바라지 않는다"(『중용』 제14장)에서 유래했지만, 다른 설도 있다.[34]

그는 기독교를 싫어했으며, "예수교의 사악한 법을 말하며, 본국의 인민을 해친다"고 했다. 또한, 일향종에 대해서도 "이것을 믿는 것은 귀신과 같다"고 하며, 일념에 사로잡힌 집단의 위험성을 지적했다(『야마가어류』 권11·신앙론). 돌고래를 먹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35]

엔포 3년(1675년), 9년간의 유배에서 풀려나 기라 요시히사 등으로부터 축복을 받았을 때 지은 한시는 다음과 같다.

엔포 8년 정월 7일, 서자 만개(후의 야마가 다카모토)에게 강의할 때 지은 노래는 다음과 같다. (첫 구절을 "초봄(はつはる)의"로 시작하는 것도 있다.)

히라도 번주 마쓰라 시게노부와 친분이 있었던 연유로 서자인 야마가 만스케(다카모토)가 히라도 번에 섬겼다.(히라도 야마가 씨)[45] 그의 동생 야마가 헤이마(요시마사)도 마쓰라 가문에 등용되어 후에 가로가 되었다.

히라도 야마가 씨 및 마쓰라 가문은 야마가 소코의 『야마가고루이』의 "복수의 일은 반드시 당시의 봉행소에 이르러, 살해당하는 연유를 연설하고, 이에 그 명을 받는다. 이것이 옛날부터의 법이다"[48]라는 구절에 근거하여 "오이시 일당[49]은 공의 면허도 얻지 않고, 무리를 지어 화재라고 속이고 암살로 침입하는 것이므로, 소행의 사상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폭거이다"라고 겐로쿠 아코 사건을 비판하고 있다. 야마가 미쓰요도 이를 따른다[50]

우에스기 겐신의 '적에게 소금을 보낸다'는 고사가 『야마가고루이』에 기록되어 있다.[47]

3. 1. 고학(古學)

쓰가루 번의 야마가 적류와 여자계 2가, 히라도 번의 야마가 방계와 서류 남자계 양씨가 야마가류를 직계 혈연자로서 계승하였다.[36][37]

  • 쓰가루 노부마사(쓰가루 번 번주)와 그의 후견인인 하타모토(구로이시 번) 쓰가루 노부히데는 야마가 소코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쓰가루 번은 소코를 1만 석으로 초빙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대신 소코의 아들인 마사자네가 등용되었다. 마사자네는 이후 쓰가루 성을 칭하는 것을 허락받고 가로직 가문이 되었다. 소코의 6대 후손으로 야마가류 병학자로 활약한 야마가 소스이가 나왔다.
  • 소코의 적자 마사자네에게 배운 쓰가루 마사오미는 아코 사건 직후, 가장 먼저 마사자네를 비롯한 가신들과 함께 기라 저택으로 달려가 요시히사의 유해를 발견하고 부상자 구호에 협력했다. 아코 낭사들은 구로이시 쓰가루 가문과 히로사키 번 쓰가루 가문으로부터의 추격을 경계하여, 센가쿠지까지 최단 거리가 아닌 도주 루트를 상당히 빠른 걸음으로 철수했다고 전해진다. (쉬면서 만 먹었다는 것은 연극 등의 창작이다.) 이 모습은 야마가류가 전해지는 히라도 번에도 기록되어 있다.[38]
  • 쓰가루 번사인 기타무라 무네노리에게 소코의 딸이 시집갔으며, 무네노리 또한 쓰가루 성을 허락받아 쓰가루 마사히로라고 칭하며 에도 가로가 되었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마사히로의 유아는 소코의 딸인 어머니의 손에 의해 야마가류 병학과 유학을 교육받아 성장하여 쓰가루 번 가로 기타무라 마사카타(쓰가루 마사카타, 야마가 교위라고도 함)가 되었다. 마사카타의 차남은 국학자이자 화가로 유명한 다케베 아야타리이다.[41][42] 다케베 씨는 기라 요시히사의 먼 친척에 해당한다.[41]

3. 2. 무사도(武士道)


  • 오다 노부나가오케하자마 전투에서 기습을 했다는 정설은 잘못되었으며, 나카시마 요새에서 직진하여 당당하게 이마가와 군에 맞섰다고 주장했다(『전략초』). 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몬 밖의 변에서 살해당한 것처럼, 야마가류는 기습, 야습, 수적 우세에 속수무책이었다.[31]
  • 무사는 두 임금을 섬겨야 하며, "임금이 임금답지 않으면 스스로 떠나야 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 "군신의 관계는 타인과 타인의 만남이며, 그 본질에 사랑하고 공경할 이유가 없다"고 하며, 주군을 위해 죽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만용을 부리지 않고, 바르게 사는 것이 "사도"의 천명이라고 했다(『야마가어류』 권13·군신론).
  • 무사는 모욕을 당하더라도 싸움을 걸어온 싸움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도망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예의 없는 용기는 좁고, 하늘을 속이고 나라를 망치는 업이다"(엔포 8년 7월)[32][33]

3. 3. 중조사실(中朝事實)

中朝事實|주초 지지쓰일본어는 "중앙 왕국의 실제 사실"로 번역되며, 야마가 소코가 일본 학자들에게 자국의 역사와 문화의 위대함을 일깨우기 위해 저술한 책이다.[7] 당시 일본 학자들은 중국 역사, 중국 문학, 중국 철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고, 일본어로 쓰인 텍스트는 거의 없었다.[7]

야마가는 일본이 신의 선물이며, 온화한 기후 등 객관적인 근거에서 중국과 일본만이 세계의 중심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신으로부터 내려온 끊임없는 황실 계보가 일본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은 일본이 신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증거이며, 따라서 일본이 중국보다 우월하다고 강조했다.[7]

다음은 中朝事實|주초 지지쓰일본어의 어조를 보여주는 발췌문이다.

"일본의 물과 토양은 다른 모든 나라보다 뛰어나며, 그 국민의 자질은 지구의 팔방에서 최고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 신들의 무한한 영원함과 신성한 계보의 끝없는 통치, 그 훌륭한 문학 작품과 영광스러운 무용담은 천지와 같이 영원할 것이다."[8]

야마가의 삶과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중요한 주제는 일본의 위대함에 대한 강조였으며, 이는 20세기 중반 일본 민족주의 문화 속에서 그의 인기와 영향력이 확대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6]

4. 겐로쿠 아코 사건에 끼친 영향

막말에는 야마가 소코의 학문이 요시다 쇼인에게 영향을 끼쳤다.[52] 야마가 소코와 관련하여 "야마가류 진고(에치고류의 하타라코토 타이코)"가 유명하지만,[52] 실제 "한 번 치고, 두 번 치고, 세 번 흐름"이라는 "야마가류의 진고"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이야기 속의 창작이다. 연극에서 오이시는 (탬버린과 같은) "단다라 안에 검은 오른쪽 두 개의 토모에(아코 오이시 가문의 문장)"가 그려진 얇은 평고를 치지만, 장군이 스스로 가문의 문장을 채로 치는 것은 불경하다.[53] 아사노 나가노리는 북이나 거문고를 매우 싫어했다.[54]

오시타이코는 전쟁터에서 아군에게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가와나카지마 그림 두루마리나 병풍 등에 그려진 "나가도 타이코"는 매우 크다. (야마가류에서는 "차 현은 적군의 대비에 3단, 4단으로 사용하면 공이 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연극에서처럼 한 사람이 왼손으로만 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야마가류에서는 장군은 지시만 내릴 뿐, 스스로 북을 치지 않는다("하타모토나 여러 손의 가작법의 일").[55] 아사노 가문의 사료에는 습격 당시 "북은 없고, 징이 울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56]

이시오카 히사오라는 궁도가는 스가야 마사토시가 야마가류를 배웠다고 주장하지만,[57] 아코시 사 편찬실은 이에 의문을 제기하며, 스가야를 "가장 행동과 생각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언급한다.[58] 마찬가지로, 오이시 요시오나 오이시 요시시게가 야마가 소코에게 야마가류를 배웠다는 설에 대해서도, 동시 편찬실은 "1차 사료인 야마가 소코 일기·연표에 전혀 기재가 없다"는 이유로 기록하지 않고 있다.[59](위키백과의 두 기사도 이를 따르고 있다).

중앙 의사회는 "사학적으로 야마가 소코와 오이시는 무관하다"고 밝혔다.[60]

소코의 저작이나 일기에는 아코 의사의 이름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반대로, 『호리베 타케쓰나 일기』, 『아카기 맹전』 등 의사의 저작이나 서간, 『호리우치 덴에몬 각서』, 『하가 세이다유 각서』 등 의사에게서 들은 문헌에도 야마가 소코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참고로, 전 아코 번사로 습격을 지원한 오이시 무닌의 손자 료조(오이시 요시오의 삼종형. 아코에서 오이시 노부키요의 세자에몬 가문을 계승. 다이산부로 가문이 절가된 후 오이시 종가가 됨)는 야마가 교위(야마가 소코의 손자, 쓰가루 번 가로·쓰가루 마사카타) 등과 적대하며, 야마가류 문하의 험담을 썼다.[61]

5. 저서


  • 중조사실
  • 무가사기
  • ''세이쿄 요로쿠''[2]
  • "무사의 신조"("부쿄")
  • "군자의 도"("시도")[3]
  • ''무도 초신 슈'' (다이도지 유잔 저)

6. 평가

야마가 소코는 일본의 위대함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일본 학자들이 중국 역사, 중국 문학, 중국 철학 연구에 몰두하던 시대에 ''추추 지지쓰''(중앙 왕국의 실제 사실)를 저술하여 일본 학자들에게 자국의 역사와 문화의 위대함을 일깨웠다.[7]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은 신의 선물이며, 온화한 기후와 신에서 내려온 끊임없는 황실 계보를 통해 신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므로 다른 어떤 나라보다 우월하다.[7]

그의 저서에서 이러한 관점을 엿볼 수 있다.

> 일본의 물과 토양은 다른 모든 나라보다 뛰어나며, 그 국민의 자질은 지구의 팔방에서 최고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 신들의 무한한 영원함과 신성한 계보의 끝없는 통치, 그 훌륭한 문학 작품과 영광스러운 무용담은 천지와 같이 영원할 것이다.[8]

야마가는 "무사의 신조"("부쿄")와 "군자의 도"("시도")를 다룬 일련의 작품을 썼다. 그는 무사 계급의 고귀한 사명과 그에 따른 의무를 설명했다.[3] 윌리엄 스콧 윌슨은 야마가가 ''시도''(부시도보다 덜 급진적인 이론) 이론에서 무사를 사회의 다른 계급에 대한 유교적 순수의 본보기로, 그리고 그 길에서 벗어나는 자들을 처벌하는 자로 정의했다고 말했다.[3] 그는 평화로운 예술, 문학, 역사가 사무라이의 지적 훈련에 필수적임을 강조했으며, 순수한 군사 귀족에서 정치적, 지적 리더십이 증가하는 방향으로의 사무라이 계급의 역사적 변혁을 상징한다.[3]

그의 사상은 겐로쿠 아코 사건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지도자인 오이시 요시오가 그의 헌신적인 제자 중 한 명이었다.[2] 그는 또한 서양 무기와 전술을 연구하고 채택할 필요성에 주목했다.

야마가는 지구구체설을 지지하고 유교의 우주관인 천원지방을 부정했다.[30] 그는 기습을 부정했으며, 사는 두 임금을 섬겨야 하고 "임금은 임금답지 않으면 스스로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31] 또한, 모욕을 당하더라도 싸움을 걸어온 싸움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32][33] 야마가 소코는 기독교를 싫어했으며, 돌고래를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35]

야마가 소코의 묘는 도쿄 신주쿠에 있는 소토 선종 사찰인 소산지에 있으며, 1943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5]

6. 1. 현대적 평가

쓰가루 번의 야마가 적류와 여자계 2가, 히라도 번의 야마가 방계와 서류 남자계 양씨가 직계 혈연자로서 야마가류를 계승했다.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츠시 야마가초의 나오에 가네츠구 저택 터에는 소코를 기념하는 "야마가 소코 탄생지"라고 적힌 석비가 있다. 글은 마쓰우라 아쓰시가 짓고, 글씨는 도고 헤이하치로가 썼다. 이 지역에는 "나오에 시미즈"라고 불린 우물이 있었다.

나오에가 성 아래의 기초를 다진 요네자와번에서는 야마가류 고학이 융성했고, 요시다 쇼인도 방문하여 치세를 평가했다.[62] 반대로 아이즈번은 소행이 비판한 주자학이 닛신칸에서는 주류였다.

7. 후세에 끼친 영향

막말에는 소코의 학문이 요시다 쇼인에게 영향을 끼쳤다.[1] 야마가의 영향력은 겐로쿠 아코 사건에서 나타났는데, 그 지도자인 오이시 요시오가 그의 헌신적인 제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2]

야마가는 "무사의 신조"("부쿄")와 "군자의 도"("시도")를 다룬 일련의 작품을 썼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무사 계급의 고귀한 사명과 그에 따른 의무를 설명했다. 윌리엄 스콧 윌슨은 그의 저서 ''사무라이의 이상''에서 야마가가 "''시도'' (''부시도''보다 덜 급진적인 이론) 이론에서 무사를 사회의 다른 계급에 대한 유교적 순수의 본보기로, 그리고 그 길에서 벗어나는 자들을 처벌하는 자로 정의했다"고 말했다. 윌슨은 야마가가 사무라이를 "일종의 전사-현자"로 생각하고 이 "초월적인 이상"의 완성을 중심으로 그의 저술을 집중했지만, "이러한 사고의 방향...은 사색으로 향하는 경향에서 에도 시대 학자들에게 전형적이었다"고 썼다.[3] 그는 평화로운 예술, 문학, 역사가 사무라이의 지적 훈련에 필수적임을 다시 강조했다. 야마가는 따라서 순수한 군사 귀족에서 정치적, 지적 리더십이 증가하는 방향으로의 사무라이 계급의 역사적 변혁을 상징한다.[3] 그의 제자 중 한 명은 다이도지 가문 출신의 사무라이인 다이도지 유잔으로, 중요한 부시도 텍스트인 ''무도 초신 슈''의 저자가 된다.

야마가의 개념은 지난 수세기 동안의 저술을 재진술하고 성문화했으며 모든 충성의 초점으로 천황을 지목했다.

야마가의 삶과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중요한 주제는 일본의 위대함에 대한 강조였으며, 이는 20세기 중반 부상하는 일본 민족주의 문화 속에서 그의 인기와 영향력이 확대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6]

일본어로 쓰인 텍스트가 거의 없었고 일본 학자들이 중국 역사, 중국 문학, 중국 철학 연구에 몰두하던 시대에 그는 일본 학자들에게 자국의 역사와 문화의 위대함을 일깨우기 위해 ''추추 지지쓰''("중앙 왕국의 실제 사실"로 번역됨)를 저술했다. 그의 주장은 일본이 일본인에게 신의 선물이며, 많은 국가가 자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하지만(여기서 그의 독자들은 그가 중국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온화한 기후라는 객관적인 근거에서 중국과 일본만이 그러한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으며, 둘 중 일본이 신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 즉 신에서 내려온 끊임없는 황실 계보가 일본에만 존재한다는 사실로 입증되므로 분명히 우월하다는 것이다.[7]

다음 발췌문에서 이 작품의 어조를 엿볼 수 있다.

"일본의 물과 토양은 다른 모든 나라보다 뛰어나며, 그 국민의 자질은 지구의 팔방에서 최고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 신들의 무한한 영원함과 신성한 계보의 끝없는 통치, 그 훌륭한 문학 작품과 영광스러운 무용담은 천지와 같이 영원할 것이다."[8]

소행의 병학 직문은 140명 정도이다. 소행의 병학을 강습한 여러 다이묘에는 쓰가루 노부마사, 쓰가루 노부히사, 도다 타다자네, 마쓰라 시게노부, 마쓰라 나가스케, 오무라 모리스미, 이나가키 시게아키, 오가사와라 나가스케, 오가사와라 나가시게, 혼다 타다자네 등이 있다. 요시다 쇼인도 야마가 소코가 융성시킨 야마가류 고학을 평가하기 위해 방문했다.[62]

8. 기타



야마가 소코의 무덤은 도쿄 신주쿠에 있는 소토 선종 사찰인 소산지에 있다. 그의 무덤은 1943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5]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2005
[2] 서적 The Samurai: A Military History 1996
[3] 서적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 Volume 2, 1600 to 2000 2001
[4] 논문 Last Testament in Exile. Yamaga Sokō's Haisho Zampitsu 1977
[5] 웹사이트 山鹿素行墓 https://kunishitei.b[...]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0-08-20
[6] 서적 Japanese Culture 20000
[7] 서적 Emperor and Nation in Japan,; Political Thinkers of the Tokugawa Period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Seattle 1964
[8] 서적 Emperor and Nation in Japan,; Political Thinkers of the Tokugawa Period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Seattle 1964
[9] 문서 昭和33年(1958年)建立の二の丸庭園奥にあった元々の銅像は、顔に涙を書く悪戯で緑青が蔓延して撤去され(廣山尭道「播州赤穂の城と町」)、平成22年(2010年)に二の丸門跡に再建立されたもの。
[10] 문서 斎藤 『山鹿素行』1頁
[11] 문서 出自については、筑前遠賀郡山鹿とも、肥後山鹿ともいう
[12] 문서 日本思想全史
[13] 날짜 1653年9月25日-翌5月5日
[14] 웹사이트 赤穂城跡二之丸門枡形発掘調査現地説明会資料 http://www.ako-hyg.e[...] 赤穂市教育委員会 2020-01-23
[15] 문서 '山鹿素行日記』について' 2004-02-25
[16] 문서 武教全書
[17] 인용구 内匠頭所に九年此れ有り、加増まで申し被可り候由、利禄の望みにて御留め候え共、知行断り申し上げ候
[18] 문서 土芥寇讎記 東京大学史料編纂室
[19] 문서 素行日記・年譜
[20] 정보 浅野長友は既に江戸で死去、満7歳の長矩は国元に不在である。
[21] 서적 山鹿素行の場合 1999
[22] 문서 山鹿素行日記 寛文六年六月廿九日
[23] 문서 山鹿素行年譜 天和元年九月廿一日
[24] 웹사이트 新宿・史跡文化財散策マップ 宗参寺 山鹿素行の墓 牛込氏の墓 - 新宿区観光協会 http://www.shinjukuk[...] 2020-01-23
[25] 서적 兵法者の生活
[26] 문서 山鹿素行年譜 延宝三年八月六日
[27] 문서 山鹿素行日記 延宝八年八月十二日
[28] 문서 松浦家関係文書 松浦史料博物館
[29] 문서 楠正成一巻抄 市立米沢図書館
[30] 서적 日本地理学人物事典 [ 近世編 ] 原書房 2011
[31] 문서 山鹿流軍学伝授書 彦根藩井伊家文書 天保9年
[32] 문서 山鹿随筆
[33] 문서 『武教全書』に見る文武の考え方 一橋大学 平成26年
[34] 서적 山鹿素行の思想 ぺりかん社
[35] 문서 山鹿素行日記 寛文八年正月五日
[36] 문서 母は素行の正室・浄智院。興信は妹の婿で高豊の継父。
[37] 문서 津軽家文書より「山鹿家系図」
[38] 문서 [[松浦清]]「心得ぬ事なり。人を出して即往きたるに、果たして大石の輩」「弘前候ばかり之を知れり」(松浦清山『甲子夜話』)。
[39] 문서 政実・亀姫の異母妹・鶴姫の婿。
[40] 문서 津軽家文書より「喜多村家系図」
[41] 서적 新版 近世文学研究事典 おうふう 2006-02
[42] 문서 「兵法者の生活」第六章.幕末兵法武道家の生涯 二.山鹿素水の業績(P217-220)
[43] 문서 素行の弟・平馬の玄孫。
[44] 문서 山鹿平馬家・山鹿伊織の弟。
[45] 문서 同「山鹿家系図」
[46] 문서 "[[大佛次郎]]「赤穂浪士」、[[歌舞伎]]「松浦の太鼓」など"
[47] 문서 『山鹿語類』より「風流」巻
[48] 문서 『山鹿語録』第一(「臣道」より報仇論)
[49] 문서 [[松浦清]]『甲子夜話』では吉良関係者に尊称、赤穂義士を蔑称の記述あり
[50] 서적 堀勇雄『山鹿素行』
[51] 문서 「山川の」または「山側の」との掛詞。
[52] 문서 「江赤見聞記」「敬考述事」ほか」
[53] 문서 "[[歌舞伎]]・[[人形浄瑠璃]]『[[仮名手本忠臣蔵]]』大星由良助([[大石良雄|大石内蔵助]])。"
[54] 문서 『赤城義臣対話』より「礒貝十郎左衛門」(安永7年写し)
[55] 문서 山鹿素行『武教全書』巻二・営法
[56] 문서 落合勝信『家秘抄』『義人纂書』第二
[57] 문서 『山鹿素行兵法学の史的研究』(P173)
[58] 문서 赤穂市史編纂室主幹・三好一行「赤穂四十七士列伝」(P112)
[59] 문서 同市編纂室「赤穂四十七士列伝」大石内蔵助良雄
[60] 문서 宗参寺「山鹿素行の墓」(「忠臣蔵史蹟辞典」2008年、中央義士会)。
[61] 문서 大石良饒『大石家系図正纂』には、弘前藩の山鹿流門下を「奸佞邪曲ノ者」などと記されている。
[62] 문서 吉田松陰『東北遊日記』(嘉永五年三月二十五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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